Bubble, Dream, Void
- 참여 작가
- 김제원 · 유지원 · 황민규
- 기간
- 2026.10.24(토) — 2026.11.08(일)
- 관람 시간
- 13:00–18:00 · 월, 화 휴무
- 장소
- 예술공간 의식주 · 서울시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 리셉션
- 2026.10.24(토) 16:00 · 참여 작가 및 기획자 참석
- 기획
- 강다원
- 협력
- 박소호
- 포스터 디자인
- 김찬민
- 주관·주최
- 예술공간 의식주
- 공간조성
- 쉘랩 · 김세욱
- 후원
-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전시 서문
몇몇 가게는 문을 닫아걸고, 그곳에 ‘건축 예정’ 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 마치 어린아이의 이가 새로 돋아나듯이, 거리는 일시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루카 호텔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찾고 있든지 간에 이루카 호텔은 깨끗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1]
‘뉴타운’이나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이름의 사업들은 2000년대의 도시 변혁을 이끌었다. 우리는 끈질긴 악연으로 이어진 재건축의 계보 위에 지금 서 있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운명을 설명하기엔 ‘노마딕’이나 ‘임시 거주지’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주위에서는 여전히 폐허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감정은 아쉬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폐허를 생산하는 일을 부정하며 동시에 동경한다. 때로는 이동하는 일을 긍정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축복한다. 전시는 2026년 현재의 관점에서의 폐허를 둘러싼 이러한 고민들과 역설에서 출발한다. 낙관과 비관이 교차한 곳에서 무엇을 열망하는지 모르는채로 재생산되는 공허한 바람만이 부유한다.
《Bubble, Dream, Void》는 이제는 도시 아래 은닉해버린 갈등과 분열, 예술의 역할을 질문한다. 전시는 폐허를 향한 동경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이 시선을 따라, 서울의 땅과 집을 둘러싼 욕망이 남긴 공허함을 되돌아본다. 그 처음은 폐허를 향한 역설적 시선이다. 앞으로도 계속 질주할 이곳에서 미술은 어떻게 반응해왔는가? 2010년대 전후, 터전을 부수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들이 대치했을 무렵 일어난 폭력은 분노를 촉발시켰다. 섬광처럼 불붙은 사건은 사람들을 그러 모았다. 그들은 오래된 건물와 거리, 공터를 일시적으로 점거했고, 임시적인 사멸의 억제제처럼, 폐허가 된(될) 장소 속으로 스며 들었다. 이것은 마치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를 테이프로 붙이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증 상태에 이른 몸이 죽음을 유예하는 약으로 잠시 호흡하듯, 이러한 시도에는 ‘유의미’한 것까지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도시에서 만기를 향해 달려가는 삶은 하나의 공간으로 뭉뚱그려 부를 수 없다. 서울의 잘게 쪼개진 큐브 안에서는 저마다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곳은 각자의 불안을 보관하는 저장소다. 서로 떨어져 고립된 이 구조가 우리를 뭉치지 못하게 한 것일까, 아니면 세대론이 우리를 줄곧 비관적인 인물로 끌어내리는 것일까? 어느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지나간 투쟁의 열기를 추억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부동산을 향한 열기만은 매번 신기록을 경신하듯 지면을 데우고 있다.
전시 제목의 세 단어 'Bubble', 'Dream', 'Void'는 서울 부동산 시장의 현상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담는다. 이 단어들 모두 뚜렷한 형체가 없거나 공허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반짝임과 사라짐, 희망과 허상, 공백과 평화. 전시는 2000년대 서울에 밀려왔다 빠져나간 재건축 사업의 메아리, 공허한 미래를 향한 새로움의 갈망을 현재의 관점에서 돌아본다. 그리고 예술 공간의 시점에서, 공간을 갈망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간절히 바라면서도 단념해 버리는 젊은 세대의 시점에서 가까운 주변부를 조망한다. 참여 작가 김제원, 황민규, 유지원은 설치, 영상, 회화 매체를 통해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원거리의 세계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작품 바깥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물리적·심리적 폐허를 다룬다. 이들은 연희동의 지금을 탐색하며 리서치를 통해 과거와 연결된 파편을 찾아내고, 본인이 실제 몸 담고 있는 환경의 단편을 그려내며, 팬데믹 시기 촬영된 푸티지를 소환하여 입주를 기다린 채 비워져 있던 아파트 내부를 면밀히 탐색한다.
김제원은 1970년대 이후 연희동에 화교가 정착하게 된 과정에 주목한다. 1970년, 태평로2가 소공동에서는 화교(華僑) 상가를 현대화하기 위한 개발이 추진되었다. 소공지구와 무교지구의 재건축이 시작되었고, 서울시는 화교 소유의 땅을 한데 모아 지상 18층 규모의 화교회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화교회관 건립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고, 화교들은 땅을 한국화약 측에 매각했다. 오늘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물이 시청 앞 프라자호텔이다.[2]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학교(현 한성화교중고등학교)의 이전 역시 소공동 재개발과 함께 연희동 화교 정착에 불씨를 더했다. 작가는 2026년 연희2구역 공공재개발을 살피며 서울과 연희동을 둘러싼 이주의 역사를 포갠다. 작가의 눈에 밟힌 것은 '분달이' 상태로 뿌리째 뽑혀 누워 있는 나무들이다. 원치 않았겠지만 이들은 사람의 손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진다. 나무는 새로운 땅에 몸을 묻고 적응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적응해야 하는 생명체의 조건은 인간에게도 다르지 않다. 강제로 뽑혀 옮겨지는 분달이 나무는 곧 우리의 모습을 은유한다. 작가는 연희동을 여러 번 방문하며 만난 사람들이 남긴 사물의 파편, 서랍장과 한성화교중고등학교의 교복, 그들이 사용한 노트들 분달이 뿌리 덩어리에 심는다. 전시장의 드로잉 작업의 배경은 오래 전 시청 근처 화교들이 머물렀던 장소의 이미지다. 그 위, 물에 녹는 종이에 연희동 홍연길의 현재 모습이 그려졌다. 종이를 지나간 홍제천 물은 과거와 오늘의 풍경을 어지러이 흘러 내린다. 땅 위로 켜켜이 쌓인 이동의 기억은 희미해진다.
유지원은 동양화 재료로 자신이 오래 머물러 온 풍경의 테두리를 그린다. 그림의 소재는 20대인 작가의 삶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원구의 장면들이다. 아파트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표적 주거 지역이었던 노원구는 2000년대 이후 인구가 꾸준히 줄었다. 이곳에서 자란 청년층이 빠져나간 데다 인근 자치구와 신도시의 성장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 노원구에서는 지은 지 30~40년 된 노후 건물과 아파트의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다. 유지원은 재개발이 한창인 노원구에서 자라며 날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저장하고 회화로 옮긴다. 그림에는 폐허가 될 운명에 놓인 장소를 향한 강한 집착이 담겨 있다. 작가는 노원구를 중심으로 폐허가 되어 가는 장면들을 한 화면 위에 자연스럽게 구축한다. 조합원도, 투쟁의 주체도 아닌 작가의 자리는 장지에 스며드는 물감처럼 풍경 속에 배어 있다. 살아온 동네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언제든 밀려날 것 같은 불안은 양가적이다. 그 감각은 그림 속 여백으로 남거나, 불온하게 쌓인 공사 현장의 사물들로 나타난다. 온기와 냉기가 공존하는 색채로 현장의 순간을 묘사한 회화는 성장의 환상을 유보한다.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가까운 일상은 한 세대가 처한 이동의 불안과 욕망을 함께 비추며, 그림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오늘날 서울의 한 조각을 담담히 보여 준다.
황민규는 가족과 친구의 생활, 그들 주위의 풍경, 뉴스 푸티지를 엮어 영상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의 〈리미널 임장기〉와 〈리미널 아파트〉는 부동산 정책을 나열하는 아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따금 엄습하는 사운드와 풍경은 환히 빛나는 신축 아파트와 대비를 이룬다.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시공사의 현수막,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 호러 영화의 투어 장면처럼 이어지는 탐험은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선 듯한 긴장을 끌어올린다. 텅 빈 공간(void)을 둘러보며 거듭되는 집 구조에 대한 감탄은 비어 있는 현재로부터 꽉 찬 미래를 고대하는 역설을 담는다. 〈리미널 임장기〉가 신축 아파트의 내부를 찍었다면, 〈리미널 아파트〉는 같은 건물의 외피를 작가가 사는 맞은편 아파트에서 '훑듯' 촬영한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전자가 내시경이라면 후자는 멀리서 외양을 좇는 파노라마다. 두 작품 모두 작가가 사는 동네의 풍경으로,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춘다. 중요한 것은 촬영 시점이다. 푸티지는 2020년 사당동 롯데캐슬 입주가 시작되기 전에 촬영되었다. 지난 6년 사이 서울의 부동산 규제는 강화와 완화를 거듭했고, 거래도 위축과 확대를 오갔다. 그사이 신축 아파트의 공백이 지녔던 가치는 예상을 넘어 범람했다. 황민규의 작업은 아파트 안팎을 오가며 관찰하고 탐색하는 가운데, 급변하는 환경 속 불안한 현재의 단편을 남긴다.
오래 머물렀던 장소를 떠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 작별에 대하여 아쉬움이 아닌, 긍정의 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금도 그렇듯 서울은 지난 세기부터 줄곧 성장만을 추구해왔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지만, ‘무언가’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채로 늙은 것을 마멸시켰다. 어린 몸의 세포가 커지고 늘어나 성체(成體)가 되는 것, 그 성장의 본래 목적은 망각한 채로. 오늘날 도시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장의 환상은 오래된 것을 은폐하며 희미한 통증을 남겼다. 통증이 남은 장소들은 서울의 폐허다. 여기서 폐허란 도심 곳곳에서 발굴되는, 사람 발길이 뜸한 낡은 공간이자 재건축을 위해 잠시 유예된 장소를 말한다. 폐허는 도시의 유서 깊은 역사가 아니라 이곳의 가공할 만한 속도와 그 실패를 증언한다.[3] 과거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실패를 낭만화하지 않기 위해 거리와 건물을 점거하고 배회하였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도시 위에 쌓인 실패의 잔해 위를 걷는다. 그리고 실패를 망각하는 곳으로 나아간다.
각주
[1]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 2009, pp. 71-73.
[2] 손정목, “[서울 만들기] 33. 소공동 재개발”, 중앙일보, 2003. 10. 2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5501, 2026. 10. 10. 접속
[3] 윤원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프레스, 2016, p. 41.









